[사설] 미 의회 ‘북한인권법’ 재승인에 거는 기대
미국 상원에서 ‘북한인권법’ 재승인을 위한 법안이 재 발의됐다. 2022년 만료된 지 3년 만이다. 3년 전 당시 상원의원이던 마코 루비오 현 국무장관이 법안 발의를 주도했으나 상원 가결 실패로 답보 상태였던 북한인권법안의 재승인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다.
미국 상원에서 ‘북한인권법’ 재승인을 위한 법안이 재 발의됐다. 2022년 만료된 지 3년 만이다. 3년 전 당시 상원의원이던 마코 루비오 현 국무장관이 법안 발의를 주도했으나 상원 가결 실패로 답보 상태였던 북한인권법안의 재승인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남자축구 대표팀 일부 선수들의 병역특례와 관련한 언행이 논란이다. 국민의 신성한 의무인 병역제도를 조롱이라도 하듯 볼썽사나운 행동에 비난 여론이 들끓자 여야 정치권에서 병역특례 제도 폐지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막을 내린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을 돌아보면 어쩐지 뒷맛이 씁쓸하다. 우리 선수단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대회가 남긴 여러 장면과 그 이면에 드러난 주최국의 태도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주최국의 준비 부족과 전반적인 무성의함이었다. 일본은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춘 선진국이다. 그러나 대회 운영은 그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경기장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 선수들은 이동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경기 일정과 현장 운영도 원활하지 못했다. 자원봉사자들은 각자의 업무에 충실했을지 모르지만, 지나친 분업화로 정작 관람객과 선수들이 필요한 안내를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하나님은 첫 두 번의 환상으로 이스라엘을 지나치게 괴롭힌 열방들을 반드시 심판하리라 약속하셨다. 이제 세 번째 측량줄을 잡은 자의 환상을 통해 그 약속을 조금 더 구체화시킨다. 첫째 환상에서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고 했다.(1:16) 먹줄은 나무를 켜거나 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수직과 평행을 맞추는 용도다. 건축에 필수다. 측량줄은 길이 너비 높이를 재는 용도이므로 완성된 예루살렘 성 자체를 측량해보라는 뜻이다.(2:2)
데일 카네기가 쓴 『근심이여 안녕』이라는 책에 콜로라도 주 한 봉우리에 있는 거대한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이 나무는 400여 년간 살아오면서 무려 14번이나 벼락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 번도 쓰러지지 않았고,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까지 다 이겨낸 나무로 유명하다. 그토록 강했던 나무가 어느 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는데, 다름 아닌 딱정벌레가 나무 속을 파먹어 버렸기 때문이란다.
필자에게는 어릴 때부터 다니던 고향 교회가 있다. 중학교 3학년까지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교회이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고향 교회에 다닌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확신을 얻었던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고향 교회에는 늘 정이 간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예수님의 부활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셨고, 물 위를 걸으셨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심지어 죽은 나사로까지 다시 살리셨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적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다.
인트론이 생식장벽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확중됨으로써 대진화론의 자연선택에 의한 무한진화의 가설은 폐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화의 가설을 바탕으로 LUCA를 모든지구 생물의 공통 조상으로 그려놓은 '생명의 계통도'는 따라서 폐기되어야 당연한 것 아닌가요?
곳곳에서 살고 또 사역하시는 사랑하는 선생님들,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계신 곳의 날씨도 견딜만하길 바랍니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을 살아서였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냇가의 미꾸라지를 잡았을 때도, 먹지라 불리는 통통한 개구리를 잡았을 때도 모두 먹어 치웠습니다. 심지어 군대에서는 뱀도 잡아먹었으니까요. 그래서 참새가 사정거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가까운 돌을 집어 들었고, 가끔은 재수 없는 참새가 맞아 역시 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야생의 동물을 보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저같이 ‘야만적인’ 인간을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동물을 보려면 ‘동물원’에나 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고요.
제자 훈련 전 과정을 마치면 훈련생들과 면담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때 저는 질문을 던집니다. “나와 함께 생명을 걸고 비전을 위해 살겠는가.”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예.” 저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바뀌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아니었다는 것을. 특히 제 손으로 직접 훈련시킨 사람이 마음을 상하게 할 때, 충격은 더 컸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이 질문이 밤마다 찾아왔습니다. 입에 붙은 말이 있었습니다. “다 부질없다.” 사람을 세우는 목회에 대한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 일을 겪으셨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을 고쳐주셨습니다.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한 명, 열에 하나인 10퍼센트였습니다. 목회로 계산하면, 열 명 중 한 명만 돌아와도 성공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어 깨우는 한 가지 영적 주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우리는 흔히 삶의 조건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건강이 무너졌을 때는 “하나님, 제 건강만 회복시켜 주시면 평생 감사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울 때는 “이 고통의 터널만 지나가고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꽉 막힌 문제가 해결되고, 간절히 구했던 기도가 응답을 받고, 내 손에 원하는 결과가 쥐어지면 감사는 저절로 넘쳐날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통념을 완전히 깨뜨려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의 가장 비참한 절망 속에서 동일한 은혜, 동일한 기적을 경험한 열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열 사람이 똑같이 부르짖었고, 열 사람이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열 사람이 똑같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