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 의회 ‘북한인권법’ 재승인에 거는 기대
미국 상원에서 ‘북한인권법’ 재승인을 위한 법안이 재 발의됐다. 2022년 만료된 지 3년 만이다. 3년 전 당시 상원의원이던 마코 루비오 현 국무장관이 법안 발의를 주도했으나 상원 가결 실패로 답보 상태였던 북한인권법안의 재승인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다.
미국 상원에서 ‘북한인권법’ 재승인을 위한 법안이 재 발의됐다. 2022년 만료된 지 3년 만이다. 3년 전 당시 상원의원이던 마코 루비오 현 국무장관이 법안 발의를 주도했으나 상원 가결 실패로 답보 상태였던 북한인권법안의 재승인 여부가 주목되는 이유다.
최근 법원이 동성혼인 관계를 ‘사실혼과 유사한 생활 공동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동성 커플을 사실혼과 마찬가지로 법적 보호 대상으로 인정한 건데 동성 결합에 관한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법원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내린 판결이란 점에서 부작용이 극심할 거로 예상된다.
요즘 노회에서 진행하는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의 참석률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어떤 분들은 "교사들의 열정이 식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 원인은 훨씬 복합적이다. 교회학교 학생 수가 줄어들고, 교사들은 직장과 가정, 교회 사역까지 감당하느라 지쳐 있다. 특히 현재 교회학교는 소수의 헌신된 교사들이 버티고 있고 대부분이 중년이상의 교사가 많다.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강습회까지 참석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지방선거가 끝나고 곳곳에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세움을 받았다. 누가 어느 자리에 오르느냐를 두고 온 사회가 분주했지만, 정작 그 자리에 앉은 이가 무엇을 내려놓을 줄 아느냐를 묻는 목소리는 드물다. 세상은 늘 “네 권리를 찾아라, 네 몫을 챙겨라”라고 말한다.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지도자상을 보여준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 유다 땅의 총독이었다. 당시 총독은 막대한 특권을 누리는 자리였고, 백성에게 세금과 양식을 거두는 ‘총독의 녹’은 법으로 보나 관습으로 보나 당연한 권리였다. 그는 무려 열두 해 동안 그 녹
6월은 ‘환경의 달’이고, 6월 7일은 환경주일이다(감리교는 6월 14일). 우리는 이 절기를 맞아 다시 묻게 된다. 창조세계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지금 이웃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약속인가.기후위기는 더 이상 멀리 있는 ‘환경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일상과 생계를 흔드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무게로 내려앉지 않는다. 폭염과 홍수, 산불 같은 재난의 상처는 언제나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에게 먼저, 더 깊게 닿는다. 기후위기의 원인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는데도 더 큰 대가를 치르는 이들이
아담이 범죄한 후 동산 숲속에 숨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던지신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오늘날 세상 역시 둘로 나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분명한 표지가 있다.첫째,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다(롬 8:1~2, 3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단순히 종교적 위안을 얻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죄의 정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린다. 이 자유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사업회가 '호국보훈의 달' 청소년 대상 교육 프로그램에서 6.25 전쟁이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는 중국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 해 말썽이다. 6·25전쟁을 바라보는 한국과 중국의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취지라는데 중국의 명백한 역사 왜곡을 왜 우리 청소년에게 가르치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대학가에서 규탄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국의 주요 신학대들이 총학생회 차원의 규탄 대열이 뛰어들어 주목된다. 이들은 국민 참정권이 짓밟혔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책임 규명과 제도 개선을 힌 목소리로 촉구했다.
1980년대 어느 겨울 저녁이었다. 연탄불이 아직 방구들 속에서 붉은 숨을 쉬던 시절, 골목 끝에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먼저 들리면 아이들은 괜히 방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곤 했다. 어머니는 빨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된장국 냄비를 다시 데웠다. 가난했지만 이상하게도 집 안에는 사람 냄새가 있었다. 밥상은 초라해도 서로 기다려주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절 부모들은 대단한 철학으로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자식만큼은 나보다 낫게 살아 가게 해야지” 하는 마음 하나였다. 아버지는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공장 야근을 했고, 어머니는 시장 좌판에서 손이 얼어 터져도 학원비 봉투를 챙겼다. 자신의 청춘은 헐값에 팔아도 자식 미래는 비싸게 사고 싶었던 세대. 어쩌면 그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마처세대’(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겸 부모 부양을 못받는 처음 세대)인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안과 자유, 그리고 신앙의 삶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진 금자탑이다. 그렇기에 6월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달이 아니라, 오늘이 있기까지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며 내일을 다시 세워가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유대인의 눈에 가시 같았던 바울이 고향 다소로 내려가 사역을 잠시 쉬고 있었어도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신자의 수는 더 많아졌다. 다른 사도들도 복음전파에 여전히 열심이었고 또 그들이 보인 권능은 예수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너희가 당신께서 한 일은 물론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예언하신(요14:12) 그대로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중풍병자 애니아를 치유하고 또 이미 죽은 다비다를 기도하여 소생시킨 사건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