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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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기독일보,‘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17세기 철학자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 명언이다. 신앙과 인간의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한 파스칼은 절망 속에서도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 명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내일 세상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여 절망하고 무책임한 오늘을 보내는 것 대신, 오늘 내가 해야 할 나의 일을 묵묵히 성실히 감당하겠다는 참으로 엄숙한 자신을 향한 준엄한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허둥대며 두려워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우왕좌왕하느라 이렇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 한다. 만약 파스칼처럼 지구의 종말 앞에서도 담담히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늘 그 자세로 살아온 내공 있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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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주의의 경고, 힘의 시대를 넘어서
기독일보,새봄을 희망차게 맞이하는 시기에 세계는 다시 충격으로 냉각되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이란 공격으로 새로운 정국에 돌입하게 되었다. 다시 힘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초강대국의 군사 행동과 이에 대한 보복이 이어질 때마다 우리는 묻는다. 왜 대화가 아니라 힘인가. 왜 설득이 아니라 응징인가. 그 배경에는 오래된 사상, 곧 ‘우월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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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잠자는 北 인권법, 보편적 인권 실종사태
기독일보,‘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집행을 담당할 ’북한인권재단‘ 출범이 마냥 지연되고 있어 법의 사문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권 사각지대인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목적으로 제정된 ’북한인권법‘의 사문화는 보편적 인권 외면이자 북한 주민을 국민으로 명시한 헌법에 대한 도전이란 점에서 더는 늦출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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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美 핵 무력 단호함, 북한도 예외 아니다
기독일보,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2월 28일 단행한 대이란 공습작전 ‘장대한 분노’(Epic Fury)는 중동에서 미국의 힘의 질서를 재확인시켜준 사건이다. 미국은 이번 작전으로 40여 년간 이란 권력의 정점에 군림해온 하메네이와 그 추종 핵심 세력을 표적 제거하는 성과를 거뒀다. 사망한 하메네이는 ‘라흐바르’(Rahbar·최고 지도자)란 이름으로 사실상 대통령 위에 군림하며 모든 권력을 휘둘러 온 상징적 인물이다. 하마스·헤즈볼라·후티반군 등 반(反)이스라엘 무장세력의 배후 조정자인 인물을 미국이 단숨에 제거했다는 건 중동에서의 권력 균형 재편의 불가피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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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덮거나 피하지 말고 회개해야 한다
기독일보,최근에 일어난 한국 대형교회 목사들의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목회자의 한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며 기도한다.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은 복음 위에 건국했고 교육·의료·복지도 한국교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교계와 나라의 세계 선교를 위해 노력한 김문훈 목사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그는 시무하는 교회를 사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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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은 웃음을 낳게 한다(창세기 21:1-6)
기독일보,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웃음이다. 동물에게도 기쁨과 같은 감정은 있지만 인간처럼 웃음을 표현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웃음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창세기에서 이삭을 출산한 사라는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웃음은 기쁨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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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와 나의 기도
기독일보,최근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설교에 등장해서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나가 아들이 없는 까닭에 아들을 가진 브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후 성전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1장 10절에 나온다. 자기에게도 아들을 주셔서 본때를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고 난 후 아들을 바치는 헌신 기도로 바뀌었다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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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심(5)
기독일보,예수의 부활은 제자들이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예기(豫期)를 깨뜨리고 실제로 일어난 경악(驚愕)의 사건이었다. 예수는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했으나 제자들은 예수의 체포와 더불어 다가온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스승의 예고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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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배우는 교사 가르치기도 잘 한다
기독일보,교회학교 교사는 단순히 성경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교사는 스스로 배우는 자세를 통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학습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이 된다. 한 교회에 20년째 교회학교를 섬기는 교사가 있었다. 누가 봐도 베테랑이다. 아이들도 좋아했고, 부모들의 신뢰도 두터웠다. 어느 날 새로 임명받은 교사가 물었다. “선생님은 이제 공과 준비가 쉬우시겠어요.” 그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매년 성경을 다시 배우고 있어요. 제가 먼저 배우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줄 것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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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호 목사의 영혼의 양식 41] 머무름도 명령이고, 떠남도 명령이다
기독일보,광야에서 사람은 두 가지로 흔들립니다. 하나는 멈추어야 하는데 움직이고 싶은 조급함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여야 하는데 머물고 싶은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대개 ‘전진’을 신앙의 승리로 착각하고, ‘정지’를 신앙의 실패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9장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는 전진도 순종이고, 정지도 순종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단 한 문장으로 이스라엘 광야 신앙을 요약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 9:23) 성경은 “얼마나 갔는지”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랐는지”도 적지 않습니다. 기록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신호’에 반응했는가입니다. 광야의 핵심은 거리나 성취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았는가, 하나님이 멈추라 하실 때 멈추었는가, 하나님이 가라 하실 때 갔는가, 그 한 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