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
룻기 강해 3. 은혜받은 룻
기독일보,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베들레헴은 고향이지만 모압 여인인 룻에게는 낯선 땅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막막하다. 무엇을 해도 이곳에서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 그것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의 나라 사람, 사람들은 저주받은 종족인 모압 여인 룻을 ‘모압 여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나오미의 며느리’라고 부르는 과부댁의 젊은 과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모압댁’이라는 말이다.
-
하나님의 법과 가이사의 법(21)
기독일보,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편에 선 복 받은 자들에게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와서 보았다”고 칭찬하셨다(마 25:36). 히브리서 기자도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라”(히 13:3)며 수형자에 대한 기억과 돌봄을 권면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자신을 부지런히 찾아와 준 오네시보로를 언급하며,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한다(딤후 1:16–17).
-
[사설] 기독교는 ‘퀴어’와 공존할 수 없다
기독일보,오는 14일 예정된 서울 퀴어퍼레이드를 앞두고 교계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동성애 문제에 관한 언론의 객관적인 보도를 요청했다. ‘거룩한 방파제’는 기자회견을 연 목적을 언론에 동성애의 실태와 사회적·보건적 문제점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
[사설] ‘차별금지법’ 우회 법안 자진 철회 해프닝
기독일보,더불어민주당 조인철 의원 등 11명이 지난달 30일 발의한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철회됐다. 법안 내용에 ‘성적 지향’이 들어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우회 법안이란 비판이 제기되자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다”며 스스로 발의를 거둬들인 거다.
-
퀴어축제, 동성애 축제 선전하는 장
기독일보,올해도 2025년 6월 14일에 퀴어(동성애자나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들이 외치는 퀴어축제가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다고 한다. 퀴어축제가 하나의 문화행사처럼 열린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동성애 법제화가 있다.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성평등'을 삽입한 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한국에서 동성애를 부추기는 시발점이 될 것이며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양성평등(남녀평등)이 아닌 성평등(젠더 평등)의 세상이 올 것이다. 성평등(性平等, 젠더 평등)이란 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법률적 권리나 사회적 대우를 동등하게 받는 것을 뜻한다. 양성평등은 남녀의 차별을 하지 말자는 의미로 보면 되고 성평등은 젠더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개념으로 매우 급직적이고 위혐한 개념이다. 생물학적 성을 해체하고 자신이 자신의 성을 결정할 수 있게 하자는 뜻이다. 성평등은 자신이 때에 따라 남자도 되기도 하고 여자가 되기도 한다. 성평등이 되면 생물학적 남녀의 성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자연히 동성애라는 개념이 없어지게 되어 합법적인 개념이 되어 버린다
-
유신진화론과 교단 총회
기독일보,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신학계 일부에서는 유신진화론을 주장하여 복음주의 신학계와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경기도 부천의 모 신학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한 교수에 의해 본격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러한 논란은 해당 학교와 교단은 물론, 그 범위를 넘어 타 교단 학자들까지 가세하여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서의 신학은 대부분 복음주의 신학 노선을 취하여 오고 있는 입장인데, 창조론에서 정통 복음주의 신학 노선과 다르게 유신진화론을 주장하여 큰 논란이 발생한 것이다.
-
국가가 바로 서려면 도덕이 바로 서야 한다
기독일보,선악의 기준을 도덕이라고 한다. 도덕이 바로 선 개인은 사회의 일원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도덕이 바로 선 나라는 모든 국민이 공정하게 존중받고 안심하고 살 수 있다. 법을 지키고 사회규범을 지켜나가면 너와 내가 존중받고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기 때문이다.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기독일보,최근 정통 개신교계 내에서조차 영적으로 혼탁해지는 조짐이 많이 노정됩니다. 강단의 설교는 성경의 가르침과 자꾸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본 시편에서 권면하는 대로 지금도 온전한 믿음의 바탕에서 새로운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뜻입니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지성이나 문명의 발달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너무나 어리석은 상태에 머물 뿐입니다.
-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기독일보,가치 있는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Our joy comes not from where we are but from whose we are.”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이렇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서 온다.”
-
예수 죽음의 의미-대속(代贖)의 죽음(1)
기독일보,예수의 죽음은 단지 무죄한 의인의 죽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위인(偉人)의 죽음을 넘어선다,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데스나 공자(Confucius)나 부처(Buddah)나 무함마드의 죽음과도 달랐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한 죽음이었다. 예수는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치신다. 복음서 저자 마가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