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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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에 대한 의사들의 생각은?
기독일보,언어의 의미와 달리 실제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스어로 eu는 ‘좋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좋은’이라는 뜻을 위험한 행위의 끌어다 사용함으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는 말이 있다. 안락사(euthanasia)라는 말의 어원은 헬라어 eu(좋은)와 thanatos(죽음)의 합성어다. 어원적으로는 좋은 죽음으로 포장해 놓은 언어다. 하지만 모든 안락사는 인간의 생명을 끊을 수 있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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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시각에서 본 영화 <악마와의 토크쇼>
기독일보,심야 토크쇼를 진행하는 잭은 방송인으로서 정상의 자리에 서고 싶다는 야망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청률은 갈수록 저조해지고, 초조해진 그는 시청률 대박을 터뜨릴 요량으로 특별한 방송을 기획합니다. 악마에게 빙의된 것으로 알려진 소녀를 게스트로 출연시켜 악마와 대화를 해보겠다는 것이죠. 이를 위해 악마와 소통했다는 초심리학 박사, 영혼을 불러낸다는 영매, 초자연현상의 속임수를 밝혀내는 전문가 등이 함께 출연합니다. 당초 기획대로 소녀에게 빙의했다는 악마를 녹화 현장에 불러들여 잭과 대화를 나누자 시청률은 솟구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고, 난장판이 된 스튜디오에서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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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복이다
5. 성전에서는 제사장의 말을 듣는 것이 복이다“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8)제사장들은 왕에게 분향하는 일은 구별 받은 제사장들이 하는 것이지 왕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만약 한다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얻지 못하는 일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어떻게 했는가?“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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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보험비 얼마?
며칠 전 어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미리 전화와 카톡으로 암 진단을 받았다는 내용을 저는 알고 있었구요. 개척한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의 중대형 교회로 멋지게 성장시키고, 지역 사회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교회 목사님이십니다. 은퇴를 몇 해 앞두고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던 겁니다.“병원에서 뭐래요? 그동안도 아프셨을 텐데 증상이 없었어요?”“피부암이래요~ 사실 동네 피부과 세 군데를 일 년 이상 다녔었거든요.”“목사님~ 그냥 무좀 후에 곰팡이에요. 이 약 드시고 처방된 약 바르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런 식으로 병원에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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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 모든 면에서 동등하다 판단
우리가 칼빈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무감이나 어떤 규칙 때문은 아니다. 우리가 칼빈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 보아도 칼빈의 여러 주장들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당시 칼빈의 신학적인 입장은 온건한 복음주의적 입장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주의신학을 그가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와 사전 조율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츠빙글리와 칼빈은 개혁주의신학을 주창한 사람들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칼빈은 처음 성찬에 대한 츠빙글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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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대방 공감하기’, ‘상대방이 나 공감하게 하기’!
날이 어두워질 무렵, 한 청년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직장에서 속상했던 어떤 일을 떠올리며 동료에게서 얻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빨아 마시는 순간, 누군가와 마주쳤다. 교회 목사님이셨다. 담배는 등 뒤로 숨겼지만, 문제는 들여 마신 연기였다. 그는 숨을 참느라 인사도 못하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담배 피운 일로 괴로워하며, 그날 이후 그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청년회장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망설이다가 사택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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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은 져도 되는가?
기독일보,“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한국교회 안에는 이상한 풍조가 하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얼버무리면서 어지간한 잘못도 모른 체하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저 은혜로 덮어두자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곡해해 피차 사랑의 빚은 얼마든지 져도 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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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기독일보,삼상 16:7b절에 이런 유명한 말씀이 나온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 이어서 외모로 이새의 장자 엘리압의 용모를 보고 왕으로 기름부으려 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성경 원문과 전혀 다르게 번역되어 있음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나 또한 오랜 세월 이 구절의 문제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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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이상주의와 니버의 현실주의
기독일보,요즈음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정치·사회·문화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하려하고, 이 요구 조건을 영혼에 호소하려는 신학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교 신학마저도 모두 좌우파 이념 대립 논쟁에 물들어 있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바탕으로 이슈들을 평가하려 하지 않는다. 과연, 신학자들은 오늘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자신들의 임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20세기의 신학사조를 이끌어 온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를 통해서 방법론을 찾아보자. 이 둘은 인류가 가장 비극적 처참한 상황, 즉 1, 2차 세계대전을 겪던 시기에 인간의 성품과 행동, 양심을 신학적으로 잘 그려 낸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해서 21세기 가치관 혼란을 겪고 있는 사회에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에 생각해 보자.